우리 땅 걷기 30여년 '발로 쓴 역사서' 100번째 펴냈어요 한겨례 |
---|
재야 문화사학자 신정일 이사장 신정일 이사장은 해외 답사기도 책으로 낼 생각이라고 했다. “이탈리아나 그리스, 중국 등 여러 나라 길을 걸었어요. 아쉽게도 유럽에서는 프랑스를 가보지 못했네요.” 그가 국내 답사 때 늘 챙겨 보는 책이 이중환의 <택리지>와 한글학회가 펴낸 <한국지명총람>이다. “<택리지>에 나오는 충청도 마일령을 찾지 못해 고심하다 <한국지명총람>에 나오는 지명 만일고개를 단서로 찾을 수 있었어요. 무척 기뻤죠.” 강성만 선임기자 “개작까지 더하면 딱 100번째 책이죠. 개작을 빼면 70권째 정도 됩니다.” 문화사학자 신정일(67)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이 최근 펴낸 <왕릉 가는 길>(쌤앤파커스)을 두고 한 말이다. 서울이나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조성된 30여개의 조선 왕릉을 지난 2년 동안 둘러보고 쓴 책이다. 조선 왕릉 순례길 600㎞의 빼어난 경관과 조선 왕가를 중심으로 쓰인 518년의 역사가 500쪽이 넘는 책에 가지런히 담겼다. 그는 지난해도 <천재 허균>(상상출판), <신정일의 신 택리지>(쌤앤파커스) 제주와 경상 편 등 모두 6권의 책을 냈다. 지난 19일 전주 덕진구 진북동 자택에서 신 대표를 만났다. <왕릉 가는 길> 표지 저자의 또 다른 수식어는 도보답사가다. 전주에 문화운동단체 ‘황토현문화연구소’를 만들고 4년 뒤인 89년부터 문화유산답사프로그램을 이끌었다. 그가 2005년에 만든 우리 땅 걷기 회원은 1만6500명이나 된다. 그는 스스로 “길에 미쳤다”고 말한다. 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 영산강, 한탄강, 만경강, 남강 등 한국의 강을 발원지에서 바다와 만나는 하구까지 대여섯 번씩 걸었고 한국의 산도 400곳 이상 올랐다. 그가 부산 오륙도에서 동해안을 따라 강원 고성까지 걸었던 길은 2010년에 ‘해파랑길’로 명명되기도 했다. 그가 제안해 국가 명승으로 지정된 곳도 강진에서 영암으로 이어지는 누릿재, 장성에서 정읍으로 가는 갈재, 고흥 금강죽봉 등 15곳에 이른다. 그가 2011년에 찾아낸 경주 읍천리 주상절리는 지금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다. 40년 가까이 살아온 전주에 ‘한국 최초의 공화주의자’로 불리는 정여립(1546~89)과 그의 대동사상을 딴 길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10대 중반부터 지금껏 2만권의 책을 읽은 탐독가이다. 그의 거실 벽면에는 <국역 성호사설> <국역 청장관전서> <국역 퇴계집> 등 헌책방에서 발품을 팔아 구한 조선 시대 문집과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등이 빼곡했다. “하루에 열두 권을 읽을 때도 있었죠. 책의 핵심을 놓치지 않으면서 빨리 읽는 편입니다. 군에 있을 때도 제가 주도해 부대원 100여 명과 함께 책이 천 권인 진중문고를 만들기도 했죠.” <천재 허균> 표지 그의 정규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에서 멈췄다. 가난 때문이었다. 초등 5학년 때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고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그에게는 너무 가혹한 현실이었다. “친구들이 중학교에 다니던 16살에 저는 임실 집에서 호롱불을 켜놓고 프란츠 카프카 전집을 읽었어요. 미천하고 불행한 제 삶이 카프카 소설 주인공과 비슷해 막힘 없이 읽었어요. 니체 전집도 그때 독파했죠.” 진학을 못 한 게 오히려 독서에는 도움이 되었단다. “학교 시험공부나 취직 시험 준비도 할 일이 없잖아요. 좋아하는 것과 연애하듯 책을 읽었어요.” 그는 85년에 4남매 중 유일하게 대학을 간 막냇동생 그리고 동생 친구들과 함께 황토현문화연구소를 만들어 시인캠프도 열고 역사 기행도 다녔다. 93년에는 동학농민군 지도자 김개남 장군 추모비를 전주 덕진공원에 세웠다. 서른 넘어 문화운동을 시작한 데는 남다른 사연이 있단다. “81년 어느 날 바로 아래 동생과 함께 옛 안기부에 끌려가 발가벗긴 채 모진 고문을 당했어요. 그때 전북대 앞에서 시식코너(한식, 양식, 중식을 함께 파는 식당) 장사를 했는데 운동권 학생들이 많이 왔어요. 제가 제대하고 제주에서 일꾼들을 모아 벽돌을 쌓아 장사 밑천을 모았는데, 안기부에서 북한 돈 아니냐며 간첩으로 몰더군요.” 일주일 만에 풀려나고는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는데 남은 인생은 덤이다. 소신껏 살자”고 결심했단다. “그때 읽은 이청준 소설 <당신들의 천국> 영향도 있었죠. 소설에 ‘자유나 사랑은 어떤 실천적인 힘의 질서 속에 자리 잡고 설 때라야 비로소 제값을 찾아 지닐 수 있다’는 내용이 있어요. 이 글을 읽고 그때까지 불확실했던 삶의 좌표를 설정할 수 있었죠.” 서울·근교 30여개 조선 왕릉 답사 600km 순례길 ‘왕릉 가는 길’ 출간 가난탓 초교 마치고 독학 ‘독서광’ 81년 ‘간첩몰이’ 당한 뒤 문화운동 85년 황토현문화연구소 꾸려 답사 그는 정여립이나 허균, 정지상, 김개남 등 한국사에서 변혁을 꿈꾸다 비극적 운명을 맞은 이들을 조명하는 책을 여럿 썼다. <천재 허균>이 대표적이다. 시인 허난설헌의 동생이자 소설 <홍길동> 저자로 알려진 허균(1569~1618)은 광해군 시절 역모를 꾀한 혐의로 능지처참을 당했다. 왜 ‘천재 허균’일까. “몇 사람의 천재가 세상을 바꿉니다. 시대를 앞서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한 허균과 정여립, 조광조, 정지상 등이 진짜 천재이죠. 정여립을 두고는 다른 당파도 ‘넓게 배우고 들은 게 많아 세상에 모른 게 없다’고 평했어요. 허균도 한번 보면 잊어버리지 않는다고들 했죠. 이들은 천재성을 자신만을 위해 쓰지 않았어요.” 허균에게 가장 끌린 게 뭐냐고 하자 그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고 답했다. “허균은 서자인 손곡 이달을 문장 스승으로 모신 뒤로 서얼 출신들과 주로 만납니다. 능력은 출중한 데 출신 때문에 벼슬길이 막힌 서얼의 처지에 깊이 공분하죠. 기생들도 같은 인간으로 대접해주고요. 허균은 심지어 ‘성인의 예법에 따르지 않고 하늘의 뜻에 따르겠다’며 예법을 헛된 것으로 보고 성욕까지 긍정합니다. 이 때문에 유학자들의 공격을 많이 받았죠.” 그는 2000년에 정여립에 대한 책을 처음 쓴 뒤 두 차례나 개작해 다시 펴냈다. “80년대 초에 단재 신채호가 쓴 <조선사신론>을 보고 정여립에 관심을 가졌어요. 단재는 최치원에게는 비판적이지만 정여립은 군신강상설(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을 타파한 동양의 위인이라고 높게 평가해요. 정여립 공부를 하면서 옛 문집도 읽기 시작했죠.” 그는 세 아이의 아빠이던 30대 중반에 검정고시로 중·고교 과정을 마쳤다. “(초등학교 졸업이라는 게) 아이들한테 미안해 검정고시를 봤어요. 지금도 ‘몇 학번이냐’ ‘전공이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난감합니다.” 2004년에 낸 <다시 쓰는 택리지>는 그의 인생에 또 다른 전환점이 됐다. “2002년에 <신정일의 한강역사문화탐사>를 내고 <한겨레> 인터뷰에서 이중환 선생의 <택리지>를 다시 쓰고 싶다고 했더니 출판사 50군데서 계약을 하자고 전화가 왔어요. 큰 출판사도 여럿 있었죠. 그때 마음 한쪽에 있던 학력 콤플렉스를 떨칠 수 있었죠.” <다시 쓰는 택리지>를 내고 그는 전국경제인연합회나 서울대에서 불러 강연도 했다. “제가 봐도 신기한 일이죠. 저는 학벌 배경이 없어 글을 쓸 때 더 조심합니다. 그 때문에 남보다 더 많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는 적어도 남한에서는 “안 가본 곳이 없는” 사람이다. 살고 싶은 고장 한 곳만 꼽아달라고 하자 그는 ‘통영 산양읍 삼덕리 미륵섬’을 꼽았다. “딱 한 달 만 살고 싶어요. 장군봉에서 바라보는 노을이나 한려수도 경관이 너무 아름다워요.” 어디가 명당이냐는 질문에는 “나를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는 곳”이라고 말했다. “오래전에 자식들한테 제가 죽으면 화장해 김제 귀신사 대적광전과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그리고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뒤편에 3분의 1씩 뿌려달라고 유언했어요.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요. 이 세 곳이 제 마음 속 명당입니다.” 통영 미륵섬 삼덕리 장군봉에서 바라본 한려수도. 신정일 이사장 제공 해파랑길 경주 읍천리 주상절리. 신정일 이사장 제공 그가 답사기행을 한 지도 30년이 넘었다. 그동안 이 땅이 더 살만한 곳이 되었냐고 하자 그는 “퇴화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무분별한 개발 때문이죠. 돈 때문에 자연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했어요. 너무 길을 많이 만들어요. 대전-통영 고속도로 중 함양-진주 구간을 경호강 위로 만들어 강의 아름다운 경관을 크게 해쳤어요. 강이 생명인데 안타까워요.” 덧붙였다. “중국 북송 시대 정치가 범중엄은 ‘악양루기’에서 ‘세상 근심은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나중에 즐긴다’고 했는데 우리를 보면 나의 즐거움은 먼저 누리고 세상 근심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아요.” 김제 귀신사 대적광전 뒤 돌계단 그에게 “산천 유람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고,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산천 유람과 같다.” 그는 “보지 않은 것은 말하지도 말라고 했다”면서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가 <지상의 양식>에서 쓴 글귀를 들려주었다. ‘바닷가의 모래가 부드럽다는 것을 책에서 읽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나의 맨발이 그것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먼저 감각이 앞서지 않은 지식은 그 어느 것도 나에게 소용이 없다.’ “답사는 늘 새로워요. 답사하면서 온갖 사물과 사람 그리고 역사를 만납니다. 그리고 나를 만나죠.” 가장 좋아하는 문장가는 조선 초기 문인 매월당 김시습(1435~93)이란다. “매월당의 인생이 슬퍼요. 제 인생도 지내놓고 보니 참 슬펐어요. 교복 입은 아이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도 당했고요.” 강성만 선임기자sungman@hani.co.kr
|